
일반적으로 마블 영화는 '재미'가 보장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터널스는 정반대였습니다. 10명의 새로운 히어로를 한꺼번에 소개하면서 우주의 기원부터 인류 역사까지 다루겠다는 야심찬 시도는 분명했지만, 정작 극장에서 2시간 30분 내내 느낀 건 '뭔가 대단한 걸 보여주려는데 왜 이렇게 지루하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아카데미 수상 감독을 영입하고 다양한 인종의 배우를 캐스팅했지만, 히어로 영화로서 가장 중요한 '몰입감'과 '쾌감'이 부족했던 작품입니다.
10명의 히어로, 하나도 기억에 안 남는 이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캐릭터 중심 서사 구축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서사(narrative)란 단순히 이야기 전개가 아니라, 캐릭터의 동기와 갈등, 성장이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3편에 걸쳐 '방패'라는 상징을 통해 보호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아이언맨은 자기중심적 천재에서 희생할 줄 아는 영웅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이터널스는 한 편에 무려 10명의 신규 캐릭터를 쏟아냅니다. 눈에서 빔을 쏘며 날아다니는 이카루스, 초고속 이동이 가능한 마카리, 정신 지배를 하는 드루이그 등 각자 능력은 다양하지만 정작 '왜 이 캐릭터를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부족했습니다. 제가 극장에서 봤을 때도 중반부터 누가 누군지 헷갈렸고, 감정적으로 몰입할 틈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히어로 영화는 능력의 독창성보다 캐릭터의 개성이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 영화를 보니 그 개성을 만들 시간 자체가 부족했습니다. 각 캐릭터에게 공평하게 분량을 나눠주려다 보니 누구 하나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했고, 결국 전부 피상적으로만 소개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는 이터널스가 수십 년간 쌓아온 서사가 있지만, 영화는 그걸 157분 안에 압축하려다 실패한 셈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마블 스튜디오는 그동안 캐릭터 빌딩에서만큼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는데, 이번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다 보니 본질을 놓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의 연출, 히어로 영화와 맞지 않았다
클로이 자오는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연출 스타일은 테렌스 말릭이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처럼 자연광을 활용한 서정적 화면과 와이드 앵글 구도가 특징입니다. 여기서 와이드 앵글이란 광각 렌즈로 넓은 공간을 담아내는 촬영 기법으로, 인물을 광활한 배경 속에 배치해 고독감이나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문제는 이 스타일이 히어로 액션 영화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히어로 영화는 캐릭터의 능력을 익스트림 클로즈업(극단적 근접 촬영)으로 강조해야 관객이 쾌감을 느낀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터널스는 정반대로 갔습니다. 이카루스가 하늘을 날아갈 때도, 마카리가 초고속으로 달릴 때도 카메라는 인물을 멀리서 잡았고, 그 결과 히어로들이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이 분노하며 날아오르는 장면은 지구가 뒤집어질 것 같은 압도감을 줬습니다. 반면 이터널스의 동일한 상황은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처럼 풍광만 아름답게 담아냈죠. 히어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존나 멋져야 한다'는 건데, 클로이 자오는 '존나 예뻐야 한다'에 집중한 겁니다.
이는 감독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장르 이해도 문제입니다. 노매드랜드에서 주인공 펀은 광활한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인물이었기에 와이드 앵글이 적절했습니다. 하지만 이터널스의 히어로들은 인류 문명 발전에 기여한 신적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자연에 파묻히는 게 아니라 자연을 압도하는 존재로 그려져야 했습니다(출처: 미국영화협회).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도 액션 장면보다 풍경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건 히어로 영화로선 치명적인 실패입니다.
정치적 올바름, 의도는 좋았으나 실행은 어설펐다
다양성 캐스팅(Diversity Casting)이란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을 고려해 다양한 배경의 배우를 기용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백인 남성 중심이었던 기존 할리우드 영화에서 벗어나 소수자를 적극적으로 재현하겠다는 시도입니다. 이터널스는 흑인, 아시아인, 라틴계, 청각장애인, 성소수자를 모두 포함시켰고, 이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니 '균형 맞추기'에만 급급한 느낌이었습니다. 10명의 히어로를 인종별로 골고루 배치하고, 각자에게 비슷한 분량을 주다 보니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서사를 갖지 못했습니다. 특히 동성 커플인 파스토스의 키스 신은 삽입했으면서, 이성 커플인 길가메시와 테나의 로맨스는 손만 잡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백인 남성과 동양 여성의 관계는 그려도, 동양 남성과 백인 여성의 적극적인 애정 표현은 회피한 셈이죠.
일반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문제가 PC 자체가 아니라 그 실행 방식이라고 봅니다. 블랙 팬서는 흑인 중심 캐스팅으로도 훌륭한 서사를 만들어냈고, 샹치 역시 아시아계 히어로를 설득력 있게 그렸습니다. 이터널스가 실패한 건 다양성을 체크리스트처럼 다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엔 차라리 주연 3~4명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조연으로 처리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하려다 모두가 희생된 케이스죠. 2024년 기준 마블 영화의 다양성 지수는 상승했지만 평균 관객 만족도는 하락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출처: 로튼토마토).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0명 캐릭터 전부에게 분량을 주려다 아무도 기억에 남지 않음
- 예술 영화 감독의 서정적 연출이 히어로 장르와 불일치
- 다양성 추구는 좋으나 체크리스트식 접근으로 서사 희생
결국 이터널스는 '의도'는 훌륭했지만 '실행'이 부족했던 영화입니다. 제가 극장을 나오며 느낀 건 '마블도 이제 한계인가'라는 우려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실험적 시도가 없었다면 앞으로의 발전도 없을 겁니다. 다만 다음번엔 야심찬 기획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능력을 갖췄는지 먼저 확인했으면 합니다. 관객은 메시지가 아니라 재미를 위해 돈을 냅니다.